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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쓰기 기초 - 글쓰기

불완전함이 만드는 진실: AI가 도달할 수 없는 영역

by Andres8 2025. 1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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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완전함이 만드는 진실: AI가 도달할 수 없는 영역

 

어느 늦은 밤, 나는 할머니가 남긴 낡은 수첩을 펼쳤다. 1970년대 노란 종이 위에 파란 볼펜으로 빼곡히 적힌 글씨들. 그 글자들은 삐뚤빼뚤했지만 살아있었다. '오늘 장에서 무 한 단을 샀다. 길동이자 학교에서 상을 받았다. 무척 기뻐한다.' 그 짧은 문장 속에 할머니의 거친 손, 시장 바닥의 냄새, 아들을 바라보는 눈빛이 전부 들어있었다. 나는 문득 깨달았다. 이런 글은 아무리 정교한 인공지능도 쓸 수 없다는 것을.

 

AI가 흉내 낼 수 없는 글쓰기의 첫 번째 본질은 몸에서 나온다. 우리의 글은 종이 위의 기호가 아니라 육체의 흔적이다. 찬 새벽공기를 마시고 쓴 일기, 해산물 알레르기로 목이 부은 채 쓴 항의 편지, 첫사랑의 거절 이후 손이 떨려 번진 시. 이 글들은 특정한 순간의 체온, 맥박, 떨림을 기억한다. AI는' 슬픔'이라는 단어를 알지만, 슬플 때 숨쉬기가 어려워지는 그 감각, 가슴이 실제로 아프다는 그 비논리적 진실을 모른다. 우리는 배고픔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아니라 배고픔을 살아낸다. 그리고 그 삶이 글자 하나하나에 스며든다.

 

두 번째는 실수와 망설임이다. 완벽한 AI는 문법적으로 정확한 문장을 생성하지만, 그 완벽함이 역설적으로 비인간성을 드러낸다. 반면 인간의 글은 지워진 흔적으로 가득하다. 쓰다가 멈추고, 지우고, 다시 쓰고, 또 망설이는 그 과정이 글 속에 남는다. '사랑한다'라고 쓰다가' 좋아한다'로 바꾸고, 다시' 그리워한다'로 고치는 그 주저함. 그 불완전함 속에 진실이 있다. 프랑스 작가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원고지에 수백 번 같은 문장을 고쳐 썼다고 한다. 그 집요한 반복, 도달할 수 없는 완벽을 향한 몸부림이 바로 인간 글쓰기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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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는 시간의 층위다. 우리가 쓰는 모든 글에는 여러 시간이 동시에 존재한다. 어린 시절 읽었던 동화책의 문장이 무의식적으로 흘러나오고, 어제 카페에서 우연히 들은 대화가 문장의 리듬에 영향을 준다. 한 편의 글은 쓴 사람의 전 생애가 압축된 결정체다. 40년을 산 사람이 쓴' 아침'과 15년을 산 사람이 쓴' 아침'은 같은 단어라도 다른 무게를 가진다. AI는 데이터를 학습하지만, 시간을 살지는 않는다. 누군가를 10년 기다린 경험, 20년 함께 늙어간 기억, 그런 것들이 단어 사이사이에 스며들어 글을 만든다.

 

네 번째는 침묵의 사용이다. 진짜 글쓰기는 말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는 예술이다. 무엇을 쓸 것인가 만큼 무엇을 쓰지 않을 것인가가 중요하다. 헤밍웨이의 빙산 이론처럼, 수면 위에 드러난 것은 8분의 1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물 아래 숨어있다. 그 숨겨진 부분이 글에 깊이를 준다. AI는 정보를 제공하려 하지만, 인간은 때로 침묵으로 더 많은 것을 말한다. '그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라는 문장 뒤에 숨겨진 수천 가지 말들, 그 말하지 않음의 무게를 AI는 계산할 수 없다.

 

다섯 번째는 모순의 포용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모순된 존재다. 사랑하면서 미워하고, 떠나고 싶으면서 머물고, 알면서 모르는 척한다. 이런 모순이 우리 글에 그대로 드러난다. AI는 논리적 일관성을 추구하지만, 인간의 가장 진실한 글은 오히려 모순으로 가득하다. '나는 그가 싫었지만, 그가 그리웠다'라는 문장의 비논리성이 바로 인간의 진실이다. 우리는 A이면서 동시에 not A일 수 있는 존재들이고, 그 불가능한 동거가 글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여섯 번째는 관계 속의 글쓰기다. 모든 글은 누군가를 향한다. 보이지 않는 독자, 떠난 연인, 돌아가신 부모, 미래의 나. 우리는 혼자 쓰지만 실은 대화하고 있다. 그 특정한 누군가를 마음에 두고 쓸 때, 글은 그 사람의 숨결과 체온을 품게 된다. 어머니를 위해 쓴 레시피에는 딸의 걱정이 배어있고,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함께 웃던 오후의 햇살이 녹아있다. AI는 불특정 다수를 위해 최적화된 텍스트를 생성하지만, 인간은 단 한 사람을 위해 온 우주를 담은 한 문장을 쓸 수 있다.

 

일곱 번째는 실패의 용기다. 좋은 글은 성공한 글이 아니라 위험을 감수한 글이다. 새로운 표현을 시도하다 어색해지고, 과감한 비유를 쓰다 실패하고, 형식을 깨다 산만해지는 그 모든 시도들. AI는 안전한 선택을 하지만, 인간은 추락을 각오하고 날아오를 수 있다. 폴 세잔이 사과 하나를 그리기 위해 평생을 바쳤듯, 우리는 단어 하나를 위해 밤을 지새운다. 그 헛된 노력, 보상받지 못할 집착, 불합리한 열정이 글에 영혼을 부여한다.

 

여덟 번째는 고통의 변환이다. 인간은 견딜 수 없는 것을 글로 만들어 견뎌낸다. 상실을 시로, 분노를 소설로, 절망을 에세이로 변환한다. 이 연금술은 AI가 모방할 수 없다. 왜냐하면 AI는 변환할 고통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카프카가 쓴 변신의 그로테스크함은 그 자신의 소외감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실비아 플라스의 시가 칼날처럼 날카로운 것은 그녀가 실제로 그 날카로움에 베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상처를 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처를 통해 말하기 위해 쓴다.

 

아홉 번째는 망각과의 투쟁이다. 인간은 기억하기 위해 쓴다. 완벽한 기억 장치인 AI와 달리, 우리는 끊임없이 잊어버리는 존재다. 그래서 더욱 절박하게 쓴다. 죽어가는 아버지의 마지막 말, 사라져가는 골목길의 냄새, 다시는 오지 않을 어느 봄날의 햇살. 우리는 시간에게 지는 전쟁을 알면서도 펜을 든다. 그 패배가 예정된 싸움의 비극성이 글에 절실함을 준다. AI는 삭제하지 않는 한 모든 것을 기억하지만, 인간은 잊어버릴까 두려워 떨리는 손으로 쓴다. 그 떨림이 문장에 생명을 준다.

 

열 번째는 죽음의 그림자다. 모든 인간의 글 뒤에는 죽음이 있다. 우리는 유한한 시간 안에서 쓴다. 이 문장이 마지막일지 모른다는 긴장, 다 말하지 못하고 떠날지 모른다는 불안. 그 유한성이 역설적으로 글에 무한한 깊이를 준다. AI는 영원히 작동할 수 있지만, 인간은 언젠가 멈출 것을 안다. 그래서 우리의 글에는 아쉬움이 배어있다. 더 많이 사랑할걸, 더 잘 표현할걸, 더 진솔할 걸 하는 후회가 문장마다 어린다. 그 후회가 글을 간절하게 만든다.

 

결국 AI가 흉내 낼 수 없는 글쓰기는 기술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살아있음의 문제다. 배고프고, 아프고, 외롭고, 기쁘고, 늙어가고, 죽어가는 것. 그 모든 것을 몸으로 겪으면서 쓰는 것. 완벽하지 않고, 때로 어설프고, 모순되지만 바로 그 불완전함 때문에 진실한 것. 우리의 글쓰기는 데이터의 조합이 아니라 삶의 흔적이다. 눈물로 번진 글자, 웃음으로 흔들린 문장, 분노로 찢어진 원고지. 그 모든 것이 우리만의 글쓰기를 만든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자. AI가 아무리 정교해져도, 당신이 추운 겨울날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쓴 그 한 문장,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고 쓴 그 짧은 메모, 슬픔을 견디기 위해 밤새 쓴 그 일기를 대체할 수는 없다. 당신의 글은 당신의 체온을 가지고 있고, 당신의 숨결을 담고 있으며, 당신의 시간을 기억한다. 그것이 진짜 글쓰기다. 살아있는 사람만이 쓸 수 있는, 죽을 운명을 가진 자만이 남길 수 있는, 그런 글쓰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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